기억이란 참으로 오묘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는 가끔 지나간 날의 소중한 순간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잊고 싶은 상처를 가슴 깊이 새긴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겪은 절망적인 사고 이후로 새로운 기억을 오직 단 10분 동안만 유지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세상에 선보인 거대한 충격작 영화 메멘토 (Memento)는 바로 이 잔혹하고도 슬픈 질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던 그 비극적인 밤의 기억만을 마지막으로 품은 채 10분 뒤면 모든 기억이 하얗게 리셋되어 버리는 한 남자의 처절한 복수극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면서도 숨 막히는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고 폴라로이드 사진에 메모를 남기며 범인을 쫓는 그의 고독한 여정은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과연 그가 쫓는 진실은 무엇이며 그 끝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레너드는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하던 현장에서 머리를 크게 다친 이후로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게 됩니다. 그의 기억은 과거 강도 사건이 일어났던 시점에 완전히 멈추어 있으며 사고 이후 새롭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딱 10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립니다. 어제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지금 왜 이 모텔 방에 앉아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자신의 아내를 죽인 범인 존 G를 찾아내어 복수하는 것입니다. 레너드는 스쳐 지나가는 단서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그 위에 인물과 장소에 대한 메모를 꼼꼼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사실들은 자신의 피부에 바늘을찔러 문신으로 영원히 새겨 넣습니다. 그에게 있어 몸에 새겨진 문신과 주머니 속 사진들은 사라져 버리는 기억을 대신하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유일한 이정표인 셈입니다.
영화 메멘토 (Memento)가 수많은 관객들에게 영원한 명작으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특유의 파격적이고 천재적인 연출 기법 덕분입니다. 이 영화는 컬러 화면으로 진행되는 역순행적 전개와 흑백 화면으로 진행되는 순차적 전개라는 두 가지의 서사 줄기를 정교하게 교차시키며 흘러갑니다. 컬러 장면은 마지막 결과부터 시작하여 일의 원인을 향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흑백 장면은 시간이 앞에서부터 뒤로 정상적으로 흘러갑니다. 관객들은 주인공 레너드와 마찬가지로 지워진 이전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영화가 제공하는 단서만을 가지고 상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연출 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의 눈과 마음을 그대로 체험하게 만들며 몰입감을 극대화합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마침내 컬러 화면과 흑백 화면이 하나로 만나는 순간 관객들은 정교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 같은 구조에 깊은 감탄을 내뱉게 됩니다.
이 영화의 완성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핵심 동력은 단연 주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인공 레너드 역을 맡은 배우 가이 피어스는 기억을 잃어버린 자의 불안함과 아내를 향한 처절한 복수심을 절제된 눈빛과 섬세한 표정으로 완벽하게 연기했습니다. 단 10분 만에 주변 상황을 잊어버리고 당황하는 인물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만으로 표현해 내는 그의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나탈리 역을 맡은 배우 캐리 앤 모스는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로 주인공을 이용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지독할 정도로 설득력 있게 그려냈습니다. 또한 테디 역의 조 판톨리아노는 친근한 친구 같으면서도 어딘가 수상쩍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연기하며 극 전체의 긴장감을 주도했습니다. 이 세 배우의 완벽한 합이 있었기에 어두운 미스터리 스릴러의 진수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레너드가 만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그를 대하지만 그 누구도 100% 신뢰할 수 없는 모호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팜므파탈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나탈리는 자신의 애인을 잃은 슬픔을 나누며 레너드에게 접근하지만 그가 기억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조종하기도 합니다. 반면 레너드의 오랜 친구처럼 행동하는 자칭 형사 테디는 계속해서 그에게 범인에 대한 단서를 주며 도와주는 척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짓말을 섞어가며 그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레너드는 자신이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뒷면에 적힌 지침을 믿을 수밖에 없지만 그 사진 뒤에 적힌 글씨조차 타인의 간계나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파악하기 힘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관객들은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됩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 작품의 진실은 관객들이 예상했던 범죄 추적극의 틀을 완전히 깨부수며 어마어마한 충격을 선사합니다.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면 흑백 화면과 컬러 화면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모든 비밀이 밝혀집니다. 레너드가 늘 이야기하던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 새미 쟁키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사실 새미의 것이 아니라 레너드 자기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레너드의 아내는 강도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고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남편 레너드가 진짜 자신을 알아보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인슐린 주사를 계속 요구했다가 결국 남편의 손에 과다 투여로 사망했던 것입니다. 이 잔인한 현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레너드는 스스로 기억을 왜곡하여 새미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내고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는 환상을 지어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형사 테디의 고백입니다. 테디는 이미 1년 전에 레너드가 진짜 강도인 존 G를 찾아 복수하도록 도와주었지만 레너드는 복수가 끝났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습니다. 레너드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존 G를 찾아 헤매는 복수의 굴레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방금 전 자신이 죽인 인물이 진짜 범인이 아님을 깨달은 레너드는 진실을 직시하는 대신 테디의 차량 번호를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새기고 테디의 사진 뒤에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메모를 남깁니다. 즉 자신이 다음 복수 대상으로 삼을 범인으로 테디를 지목하며 스스로 또 다른 거짓 환상을 완성해 낸 것입니다.
영화 메멘토 (Memento)는 영화 역사에 남을 독창적인 구성과 철학적인 메시지로 가득한 뛰어난 수작임이 분명합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서스펜스 형식으로 훌륭하게 풀어냈다는 점은 최고의 장점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독창적인 연출 방식이 모든 관객에게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역순으로 구성한 복잡한 플롯 때문에 한 번만 봐서는 모든 복선과 줄거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집중력을 조금만 놓쳐도 인물들의 관계나 흐름을 놓치기 쉽다는 명확한 단점이 존재합니다. 상업적인 오락 영화처럼 명쾌하고 시원한 결말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주인공의 자아도취적인 비극과 열린 결말이 다소 찜찜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꼭 한 번쯤 경험해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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