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디악 후기 (Zodiac), 데이비드 핀처가 그려낸 집착과 미제사건의 초상

세븐과 파이트클럽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시킨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만든 영화라기에 처음에는 자극적인 연쇄살인마 스릴러를 기대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조디악은 그런 기대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영화였습니다. 화려한 반전이나 잔혹한 살인 장면으로 관객을 몰아붙이는 대신 실제로 벌어졌던 미제사건을 집요할 정도로 차분하게 재구성하는 데 집중하는 작품이었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실존 연쇄살인범 조디악 킬러를 다룬다는 소재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지만 정작 이 영화가 진짜로 파고드는 것은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그 정체를 좇는 사람들의 집착과 몰락이었습니다. 로버트 그레이스미스가 쓴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얼마나 사실에 충실하게 접근했는지도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제이크 질렌할과 마크 러팔로 그리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화려한 캐스팅이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냈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디악을 직접 관람하며 느낀 스토리와 캐릭터 그리고 연출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된 이십 년에 걸친 추적

이야기는 1969년 여름 샌프란시스코의 유력 신문사인 크로니클 앞으로 배달된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됩니다. 살인자가 보내는 것이라며 시작하는 이 편지에는 이미 벌어진 두 건의 살인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함께 암호문이 동봉되어 있었고 신문에 게재하지 않으면 살인을 계속하겠다는 협박이 담겨 있었습니다. 범인은 스스로를 조디악이라 칭하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롱 섞인 편지와 암호를 보내오고 택시운전사를 살해한 뒤에는 피 묻은 셔츠 조각까지 함께 보내는 대담함을 보입니다. 이 사건을 다루는 크로니클의 시사만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는 처음에는 그저 암호 해독에 흥미를 느끼는 방관자에 가까웠지만 사건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에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의 형사 데이브 토스키와 그의 파트너 빌 암스트롱이 수사에 착수하고 크로니클의 기자 폴 에이버리가 사건을 취재하면서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구조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단순히 범인을 잡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사는 지지부진해지고 유력한 용의자였던 아서 리 앨런에 대한 심증은 쌓여가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답답한 흐름 자체가 이 영화의 진짜 주제라는 사실을 관람 중반부터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편지와 암호라는 단서를 손에 쥐고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관할권 문제나 증거 불충분으로 수사가 미끄러지는 장면들이 반복되는데 이 지지부진함을 관객이 고스란히 함께 견뎌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감독이 의도한 연출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배우가 그려낸 집착의 세 가지 얼굴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는 사건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깊이 사건에 매몰되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던 관심이 어느 순간 가정과 일상을 위협하는 집착으로 변질되어가는 모습을 질렌할은 과장 없는 담백한 연기로 설득력 있게 그려냈습니다. 마크 러팔로가 맡은 형사 데이브 토스키 역시 인상적입니다. 원칙을 중시하는 노련한 수사관이 결정적 증거의 부재 앞에서 서서히 지쳐가는 모습을 러팔로는 절제된 표정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전달해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에서 가장 강렬했던 인물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기자 폴 에이버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재기발랄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사건을 취재하던 인물이 조디악의 협박과 알코올 의존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을 다우니 주니어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매력과 깊은 황폐함을 오가며 소름 끼치도록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조디악이라는 존재에 사로잡히고 서서히 소진되어가는데 이 세 갈래의 집착이 교차하며 쌓이는 무게감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변호사 멜빈 벨리를 연기한 브라이언 콕스와 용의자 아서 리 앨런 역의 존 캐럴 린치 역시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극의 사실감을 한층 더해주었습니다.

핀처 특유의 치밀한 연출과 다소 느린 호흡

데이비드 핀처는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조디악 사건에 대한 자체적인 조사에만 십팔 개월을 쏟아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결과물은 화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정교하게 재현한 미술과 의상 그리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도입해 촬영한 영상은 사실적이면서도 은근히 서늘한 질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시점 숏을 활용해 평화로운 주택가를 비추다가 순식간에 폭력으로 전환되는 연출은 이 영화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사건을 다룰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만 156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화려한 반전이나 격렬한 액션 없이 수사의 정체와 좌절이 반복되다 보니 상당수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꼈다는 평가에도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핀처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절제되고 우직한 스타일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담담함이 오히려 실화가 가진 무게감을 배가시키는 동시에 관람 내내 인내심을 요구하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절제된 스타일 덕분에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핀처가 감독으로서 한 단계 성숙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는데 대중적 흥행과 비평적 성취가 이렇게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우도 흔치 않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조디악의 결말을 다루는 내용이니 아직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 부분을 건너뛰시길 권해드립니다. 수사가 공식적으로 종결된 이후에도 그레이스미스는 홀로 조사를 이어가며 유력한 용의자 아서 리 앨런에 대한 단서를 하나씩 쌓아갑니다. 앨런의 생일이 조디악이 변호사 멜빈 벨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던 날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간에는 조디악의 편지가 단 한 통도 발송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확인하면서 심증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져갑니다. 결정적으로 앨런이 살던 곳이 목격자 달린이 일하던 식당에서 불과 사십오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레이스미스는 앨런이 범인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데이브 토스키는 이를 법정에서 입증할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그저 책을 마무리하라는 말만 남깁니다. 결국 그레이스미스는 철물점에서 일하던 앨런을 직접 찾아가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장면으로 그의 개인적인 여정은 마무리됩니다. 살인자와 얼굴을 맞대고 눈을 바라보고 싶다던 그레이스미스의 말처럼 이 장면은 법적인 단죄가 아니라 한 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대사 한마디 없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정적이면서도 가장 긴장감 넘치는 순간으로 다가왔는데 확실한 물증 없이도 심증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의 한계와 그 무게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자막을 통해 이후 목격자 한 명이 앨런을 범인으로 지목했지만 그가 이미 사망한 뒤라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았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하며 막을 내립니다.

조디악을 마치고 남는 솔직한 총평

조디악은 통쾌한 범인 검거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상당히 낯설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짜로 그리고자 했던 것은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져가는 인간들의 초상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고 나면 전혀 다른 감상으로 다가옵니다. 제이크 질렌할과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세 배우가 그려낸 집착과 소진의 서사는 실화라는 무게감과 맞물려 상당히 묵직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데이비드 핀처 특유의 치밀한 연출과 시대 재현 역시 이 영화의 완성도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었습니다. 다만 15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뚜렷한 클라이맥스 없이 좌절과 반복이 이어지는 구조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지점입니다. 실제로 국내 개봉 당시 관객 수가 십팔만 명 수준에 그쳤다는 점에서도 대중적인 흥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한 결말과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곱씹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봉 당시에는 저평가되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핀처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이 지닌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장점 세 배우가 그려낸 밀도 높은 집착의 서사 실화를 치밀하게 재현한 핀처의 연출력 진실을 정직하게 마주한 미제사건 결말

단점 156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과 느린 호흡 뚜렷한 클라이맥스 부재로 인한 지루함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결말의 답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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