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서 놓을 수 없는 스마트폰 그 중독의 끝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스마트폰 화면을 봅니다. 새로운 메시지가 왔는지 '좋아요'가 몇 개나 눌렸는지 세상에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끊임없이 확인합니다. 그것은 이제 습관을 넘어선 중독에 가깝습니다. 이 중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합니다. 만약 그 찰나의 확인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든다면 누구를 탓해야 할까요. 기술을 만든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사용한 자신일까요. 블랙미러 시즌5의 두 번째 에피소드 '스미더린 (Smithereens)'은 이처럼 가장 현실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스미더린'은 먼 미래의 공상 과학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소셜 미디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선 개인의 처절한 절규를 담아낸 현대 스릴러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 한 번의 알림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하는지 냉정하고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스미더린' 직원을 납치한 한 남자의 절박한 요구
이야기는 런던 외곽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크리스는 승차 공유 서비스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일 거대한 소셜 미디어 기업 '스미더린'의 본사 앞에서 승객을 기다립니다. 그의 차는 지저분하고 그의 정신은 불안정해 보입니다. 그는 스미더린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만 골라 태우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는 분노 조절 명상 앱을 들으며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청년 제이든이 그의 차에 탑니다. 크리스는 그가 스미더린에서 일한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차의 경로를 이탈해 그를 납치합니다. 제이든은 겁에 질려 자신이 그냥 인턴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크리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의 요구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단 한 사람 스미더린의 창업자이자 CEO인 빌리 바우어와 통화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크리스는 제이든의 머리에 복면을 씌우고 경찰을 피해 외딴 시골길로 차를 몰아갑니다. 그의 절박한 인질극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경찰과 거대 기업의 숨 막히는 두뇌 싸움
크리스의 차량은 경찰의 추격을 받다 결국 한적한 들판에서 멈춰 섭니다. 차는 도랑에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인질극은 대치 상황으로 변합니다. 경찰은 즉각 현장을 통제하고 저격수를 배치하며 협상 전문가를 투입합니다. 하지만 경찰의 대응은 전통적이고 더딥니다. 그들은 크리스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 시각 '스미더린' 본사에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작전이 펼쳐집니다. 인턴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스미더린의 임원들은 경찰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그들은 경찰의 도청을 피해 크리스와 직접 소통 채널을 엽니다. 그리고 회사가 가진 방대한 데이터를 이용해 크리스의 신상을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크리스의 스미더린 계정 그의 승차 공유 서비스 기록 삭제된 프로필 정보까지 단 몇 분 만에 모두 복원해 냅니다. 경찰이 크리스의 이름을 알아내기도 전에 스미더린은 그의 과거 행적 그의 정신 상태 그리고 그가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에 대한 추측까지 모두 끝마칩니다. 이 에피소드는 국가 권력인 경찰과 거대 테크 기업의 정보력을 적나라하게 비교합니다. 스미더린은 경찰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고 효율적이며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습니다.
절망과 공허를 연기한 배우들 앤드류 스콧과 토퍼 그레이스
블랙미러 '스미더린'은 두 핵심 인물의 연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작품입니다. 인질범 크리스를 연기한 앤드류 스콧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입니다. 그는 드라마 '셜록'의 모리아티로 보여준 광기와는 정반대의 처절한 절망을 연기합니다. 앤드류 스콧의 연기는 과장되지 않습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불안감과 죄책감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자의 공허함을 떨리는 목소리와 붉게 충혈된 눈빛만으로 완벽하게 전달합니다. 시청자는 그의 범죄 행위를 보면서도 그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게 됩니다. 스미더린의 CEO 빌리 바우어를 연기한 토퍼 그레이스 역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는 전형적인 악마 같은 CEO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오히려 고립되어 명상 캠프에 숨어 지냅니다. 그는 크리스의 절규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창조물이 괴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한 복잡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두 사람이 마침내 통화하는 장면에서 앤드류 스콧의 폭발하는 절규와 토퍼 그레이스의 공허한 침묵은 이 드라마의 모든 메시지를 함축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빌리 바우어와 연결된 순간 밝혀진 진실
이 부분부터는 '스미더린' 에피소드의 결정적인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원치 않는 분들은 이 부분을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경찰의 저격수가 크리스를 조준하고 스미더린 임원들이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만 크리스는 오직 빌리 바우어와의 통화만을 고집합니다.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된 빌리 바우어가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리스와 직접 통화를 연결합니다. 마침내 크리스는 자신이 이 끔찍한 인질극을 벌인 이유를 털어놓습니다. 몇 년 전 크리스는 약혼녀와 함께 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스마트폰에서 스미더린 알림이 울렸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 알림을 확인했습니다. 그가 화면에서 눈을 뗀 것은 단 2초였습니다. 그 2초 동안 그의 차는 중앙선을 넘었고 마주 오던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 사고로 그의 약혼녀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상대편 운전자 역시 사망했습니다. 크리스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단 2초의 확인조차 참지 못하게 만든 스미더린 앱의 중독성을 저주했습니다. 그는 그저 이 끔찍한 진실을 이 지옥 같은 죄책감을 그 앱을 만든 창조주 빌리 바우어에게 직접 고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돈이나 명예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고통을 알아줄 단 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빌리 바우어는 그의 고백에 충격을 받고 자신들 역시 앱의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심리학자를 고용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통화가 끝나고 크리스는 모든 것을 이뤘다는 듯 인질 제이든을 풀어주려 합니다. 그는 제이든과 몸싸움을 벌이며 총을 스스로에게 겨눕니다. 하지만 차 밖의 경찰 저격수는 이 상황을 오해합니다. 크리스가 제이든을 해치려는 것으로 판단한 저격수는 방아쇠를 당깁니다.
기술은 멀리 있고 비극은 너무나 가까이 있습니다
블랙미러 '스미더린'은 시리즈의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기술적인 충격이나 미래적인 설정은 부족합니다. 이것은 이 에피소드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SF적 상상력을 기대한 시청자에게는 다소 밋밋한 현대 스릴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미더린'의 진짜 공포는 이 이야기가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앤드류 스콧의 신들린 연기와 숨 막히는 긴장감은 어떤 공포 영화보다 현실적인 공포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블랙미러 역사상 가장 냉소적이고 강력한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크리스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은 전 세계 스미더린 사용자들의 스마트폰에 '속보' 알림으로 뜹니다. 빌리 바우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그 알림을 단 1초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한 그 비극조차 결국 사람들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알림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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