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거나 돌이키고 싶은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을 때 우리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며 과거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영화 플래시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그에 따른 막중한 책임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초능력을 가진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상처 입은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가슴 뭉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가족애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정작 가장 구하고 싶었던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주인공의 슬픔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이제 화려한 시각 효과와 박진감 넘치는 액션 너머에 숨겨진 뜨거운 가족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에즈라 밀러와 마이클 키튼이 선보이는 환상적인 연기력의 깊이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단연 주연 배우들의 열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주인공 배리 앨런 역을 맡은 에즈라 밀러는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극의 중심을 든든하게 잡았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만난 철없는 18세의 배리와 성숙하지만 상처를 간직한 현재의 배리라는 상반된 두 캐릭터를 눈빛과 말투 그리고 미세한 몸짓만으로 명확하게 구분해 냈습니다. 두 명의 배리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없는 호흡은 배우의 뛰어난 역량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특히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에 보여준 에즈라 밀러의 섬세한 표정 연기는 관객들이 주인공의 아픔에 온전히 공감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전설적인 배트맨으로 돌아온 마이클 키튼의 존재감은 실로 압도적입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올드 팬들에게는 벅찬 감동을 그리고 새로운 팬들에게는 묵직한 신뢰감을 주었습니다. 마이클 키튼은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세월의 무게를 견뎌온 은둔 고수로서의 면모를 우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연륜이 묻어났으며 액션 장면에서도 노련함이 돋보이는 연기를 펼쳐 보였습니다. 사샤 카예가 연기한 슈퍼걸 역시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어머니를 구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부른 비극의 시작
주인공 배리 앨런은 중앙도시의 범죄 현장 분석가로 일하며 남몰래 히어로 플래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저스티스 리그의 일원으로서 뒤처리를 전담하는 듯한 자신의 처지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지만 시민들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슬픔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어린 시절 괴한에게 살해당한 어머니와 그 살인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입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증거를 찾으려 애쓰던 배리는 자신이 빛보다 빠르게 달릴 때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닫게 됩니다. 브루스 웨인은 과거를 바꾸는 행위가 현재와 미래를 망칠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배리는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배리는 결국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가 살해당하던 날 식료품점에서 깜빡했던 토마토 통조림을 카트에 미리 넣어둡니다. 이 작은 행동 하나로 어머니는 죽지 않게 되었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식료품점에 다시 가지 않아도 되었기에 살인범 누명을 쓰지도 않게 됩니다. 기쁨에 찬 배리는 현재로 돌아가려 하지만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습격을 당해 시공간의 틈으로 튕겨져 나가게 됩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자신이 원래 살던 시간이 아닌 2013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배리는 아직 초능력을 얻기 전인 열여덟 살의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영웅과 낯선 세계에서 마주한 절망적인 위기
2013년의 세계에 떨어진 배리는 어머니가 살아있고 온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에 큰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날은 바로 원래의 배리가 벼락을 맞고 플래시의 능력을 얻어야 하는 운명의 날이었습니다. 현재의 배리는 과거의 자신에게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 실험실로 향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로 과거의 배리가 능력을 얻는 대신 현재의 배리가 자신의 모든 초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구에는 과거에 물리쳤던 조드 장군이 침공해 옵니다. 원래의 역사라면 슈퍼맨이 나타나 그를 막아야 했지만 이 바뀐 세계에는 슈퍼맨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배리는 저스티스 리그의 동료들을 찾으려 하지만 아쿠아맨은 태어나지도 않았고 원더우먼과의 연락도 닿지 않습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배트맨을 찾아가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자신이 알던 브루스 웨인이 아닌 은퇴하여 폐인이 된 노년의 브루스 웨인이었습니다.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브루스 웨인은 배리의 간절한 설득에 다시 배트케이브의 문을 엽니다. 그들은 조드 장군을 막기 위해 억류되어 있다는 슈퍼맨을 구출하러 러시아의 비밀 기지로 침투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태양 빛을 보지 못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슈퍼걸 카라였습니다. 배리는 능력을 잃은 상태에서도 어린 자신을 교육하며 조드 장군과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한 처절한 사투와 깨져버린 시공간의 유리창
초능력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번개를 맞기로 결심한 배리는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겨우 속도를 회복합니다. 회복된 카라와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 그리고 두 명의 플래시는 조드 장군의 군대에 맞서 광활한 사막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조드 장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슈퍼걸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배트맨 역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두 배리는 다시 시간을 되돌려 그들을 살리려 시도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전술을 바꾸고 상황을 개선하려 애쓰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슈퍼걸과 배트맨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과거의 배리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시공간을 역행하며 상황을 바꾸려 하지만 그럴수록 시공간의 균열은 더욱 심해져 갑니다. 현재의 배리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과거를 바꿨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인 결과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지점은 결코 바꿀 수 없는 고정된 사건이며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 하면 할수록 온 우주가 붕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시공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리는 수많은 다중 우주가 충돌하며 파괴되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로지 과거를 바꾸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천 년의 시간을 헤매다 괴물이 되어버린 미래의 자신인 다크 플래시를 마주하게 됩니다.
스포일러 주의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한 눈물의 작별과 선택
다크 플래시는 현재의 배리가 과거를 고치지 못하게 방해하자 분노하며 그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배리가 현재의 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크 플래시 역시 존재 자체가 소멸하게 됩니다. 모든 소동이 가라앉은 시공간의 방에서 배리는 결단을 내립니다. 어머니를 살려두면 결국 온 세상이 멸망한다는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배리는 다시 어머니가 살해당하기 직전의 식료품점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정체를 숨긴 채 어머니의 품에 안겨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의 카트에서 토마토 통조림을 다시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으며 역사를 원래대로 되돌립니다. 다만 아버지를 구하고 싶은 마음만은 버리지 못해 CCTV의 위치를 살짝 조정하여 아버지의 알리바이가 증명될 수 있게 만듭니다. 현재로 돌아온 배리는 재판에서 아버지가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을 지켜보며 안도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법정을 나선 배리 앞에 브루스 웨인의 차가 도착합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은 배리가 알던 브루스 웨인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의 인물이었습니다. 배리가 CCTV 위치를 바꾼 아주 작은 행동조차 또 다른 평행 우주를 만들어냈음을 암시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과 서사적 완성도 사이의 냉정한 평가
영화 플래시는 감정적인 서사와 액션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훌륭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후반부 다중 우주가 겹쳐지며 역대 DC 영화들의 영웅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은 팬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시간 여행이라는 다소 복잡할 수 있는 소재를 가족애라는 명확한 주제로 관통하여 관객들이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든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시각적인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영화 초반부의 영아 구조 장면이나 시공간의 방에서의 CG 처리는 기술적 한계라기보다는 연출적 선택에 가까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소위 불쾌한 골짜기라고 불리는 현상이 느껴질 정도로 인물들의 얼굴 묘사가 조잡하게 보일 때가 있어 몰입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후반부 전투 장면이 다소 급하게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어 각 캐릭터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진정성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는 자극적인 히어로물 홍수 속에서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완벽한 영화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DC 유니버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 역할은 충분히 해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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