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 (The Plot), 우연을 가장한 완벽한 살인 그리고 조작된 진실에 갇힌 남자의 고독한 사투

뉴스에서 보도되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보며 혹시 저것이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계획된 살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멀쩡히 길을 걷다가 맨홀 뚜껑이 열려 추락하거나 공사장에서 벽돌이 떨어져 사망하는 일들이 과연 순수한 우연일지 아니면 철저하게 계산된 필연일지 묻는 영화가 있습니다. 2024년 5월 개봉하여 관객들에게 진실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를 질문했던 영화 설계자는 홍콩 영화 엑시던트를 원작으로 하여 한국적인 느와르 색채를 입힌 범죄 스릴러입니다. 참치캔보다 더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배우 강동원과 연기 괴물들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긴장감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모든 사고는 조작될 수 있다고 믿는 남자와 그의 팀

주인공 영일은 의뢰받은 청부 살인을 완벽한 사고사로 위장하는 설계자입니다. 그는 세상에 우연이란 없으며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조작하면 결과 또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인물입니다. 영일의 곁에는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팀원들이 있습니다. 베테랑이자 팀의 맏언니인 재키 그리고 변신의 귀재이자 팀의 위장 전문가인 월천 마지막으로 막내이자 기술 담당인 점만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경찰도 보험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쓰고 현장을 통제하여 타겟을 제거합니다. 그들에게 살인은 폭력이 아니라 물리학이자 심리학이며 타이밍의 예술입니다.

영화 초반 그들이 보여주는 작업 방식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타겟이 매일 지나가는 길의 경사도를 계산하고 배수구를 막아 물웅덩이를 만든 뒤 미끄러짐을 유발하여 떨어지는 물체에 맞게 하는 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타겟의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 걷는 보폭 신호등을 건너는 타이밍까지 모든 것이 계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영일은 전체를 조율하는 지휘자처럼 팀원들에게 무전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시를 내리고 팀원들은 마치 손발이 척척 맞는 톱니바퀴처럼 움직입니다. 첫 번째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들은 거액의 돈을 챙기지만 영일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건조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일에게 거절하기 힘든 위험한 의뢰가 들어옵니다. 타겟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인이자 온 국민의 관심을 받는 인물인 주성직입니다. 의뢰인은 다름 아닌 주성직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어머니를 죽였다고 믿고 있었고 더 이상의 악행을 막기 위해 아버지를 사고사로 처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유명 인사를 건드리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나 큰일이기에 팀원들은 반대합니다. 언론의 주목을 받을 것이 뻔하고 실패할 경우 꼬리가 밟힐 확률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일은 묘한 도전 의식과 함께 이 의뢰를 수락합니다.

설계는 시작되었습니다. 영일은 주성직이 자주 찾는 사우나와 그가 이동하는 동선을 파악합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을 D-데이로 잡습니다. 빗물과 전기는 사고사를 위장하기에 가장 좋은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성직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플래시 세례를 받는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미리 섭외한 유튜버들을 이용해 시선을 분산시키고 낡은 건물의 배선을 조작하여 감전 사고를 유발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전 당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그들의 계획을 도와주는 듯했습니다. 모든 것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듯 보였고 주성직은 그들이 파놓은 함정 안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와 동료의 죽음 그리고 시작된 의심

그러나 현장은 언제나 변수가 존재합니다. 주성직이 감전되어 쓰러지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합니다. 팀의 막내 점만이 현장을 수습하던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단순한 실수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영일의 눈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습니다. 점만이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를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성직의 죽음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단순 사고사로 종결되는 듯했지만 영일의 마음속에는 거대한 불안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의 설계를 역이용하여 우리를 제거하려는 또 다른 설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영일이 이런 의심을 품는 데에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합니다. 영일에게 설계를 가르쳐준 스승이자 멘토였던 짝눈 역시 과거에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짝눈은 영일에게 청소부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청소부는 사고 조작 전문가들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더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조직이라고 했습니다. 영일은 짝눈의 죽음 역시 청소부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었고 점만의 죽음에서 짝눈의 죽음과 유사한 패턴을 감지한 것입니다. 이제 영일에게 중요한 것은 의뢰금이나 성공이 아니라 생존과 진실 규명이 되었습니다.

영일은 독자적인 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는 사고 현장의 CCTV를 수십 번 돌려보며 수상한 인물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보험사 직원이자 사고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치현이라는 인물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치현은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젠틀한 보험 조사원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였습니다. 영일은 이치현이 바로 청소부의 핵심 인물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미행하고 감청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치현은 마치 영일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행동하며 영일의 심리를 자극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팀 내부에서도 균열이 발생합니다. 재키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을 보이며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월천은 정체불명의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의심병이 도진 영일은 이제 자신의 팀원들조차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재키가 약을 먹는 것도 월천이 전화를 받는 것도 모두 자신을 배신하고 청소부와 내통하는 증거로만 보입니다. 영일은 자신의 아지트에 수십 개의 모니터를 설치하고 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합니다. 그가 설계했던 완벽한 세상이 그를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진실을 쫓는 추격전과 무너져내리는 정신

영화의 중반부는 영일과 이치현의 숨 막히는 심리전 그리고 영일의 무너져가는 정신 상태를 밀도 있게 그려냅니다. 영일은 이치현의 사무실에 잠입하여 증거를 찾으려 하지만 그곳에는 깨끗하게 정리된 서류들뿐 결정적인 단서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치현은 영일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보고 있는 게 진실이라고 확신합니까"라며 도발합니다. 영일은 이치현이 주성직 사건뿐만 아니라 짝눈의 죽음 그리고 점만의 죽음까지 모든 것을 설계한 배후라고 확신하며 그를 잡기 위한 덫을 놓기로 결심합니다.

영일은 이치현을 유인하기 위해 또 다른 설계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이번 설계는 타겟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타겟이 자신을 죽이러 오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일부러 노출시키고 팀원들에게는 거짓 정보를 흘립니다. 누가 배신자인지 가려내기 위한 잔혹한 테스트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일은 점점 고립되어 갑니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집에서조차 마음 편히 쉴 수 없게 되고 지나가는 행인의 눈빛조차 의심하게 됩니다. 강동원 배우는 이 구간에서 피로와 불안에 찌든 영일의 모습을 건조하고 퀭한 눈빛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냅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 영일은 재키와 월천을 불러냅니다. 그는 재키가 치매 증상 때문에 실수한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정보를 팔아넘겼다고 추궁합니다. 재키는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영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때 월천이 나서서 영일을 말리지만 영일은 월천의 숨겨진 과거와 약점을 들추어내며 그를 모욕합니다. 팀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영일은 이제 혼자서 거대한 조직과 싸워야 한다는 절망감과 동시에 반드시 이치현의 목을 따겠다는 광기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설계 능력을 총동원하여 이치현과의 마지막 대결을 준비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허무와 충격 사이를 오가는 결말의 진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영일이 이치현을 납치하여 자신의 아지트로 끌고 오면서 시작됩니다. 영일은 이치현을 묶어놓고 청소부의 정체를 밝히라고 고문하듯 심문합니다. 하지만 이치현은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며 "당신은 그냥 사고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야. 세상에 청소부 같은 건 없어"라고 말합니다. 영일은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때 영일의 아지트로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사실 재키가 영일의 폭주를 막기 위해 신고를 했던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집니다. 영일이 의심했던 월천의 배신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월천은 영일을 끝까지 지키려다 이치현과 연관된 인물들 혹은 우연한 사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재키 역시 영일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치매로 인해 기억이 왜곡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영일의 의심이 만든 허상이 팀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치현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보험 조사원인지 아니면 정말로 고단수의 청소부인지 영화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치현 역시 모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영일만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존은 승리가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일은 여전히 수많은 모니터 앞에 앉아 세상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들이 청소부의 설계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망상이 만들어낸 비극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의 손짓 하나 시선 하나가 모두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신호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영일이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는 설계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체스판 위에서 놀아난 말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남깁니다.

결말은 열린 결말이자 닫힌 결말입니다. 청소부라는 조직의 실체는 끝내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일의 편집증이 만들어낸 괴물일 수도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거대한 시스템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일이 이제 영원히 의심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고와 살인의 경계가 무너진 것처럼 진실과 거짓의 경계도 무너져버린 채 영화는 영일의 공허한 눈빛을 클로즈업하며 막을 내립니다.

강동원, 우산 쓴 남자의 전설을 갱신하는 서늘한 비주얼

영일 역의 강동원은 이 영화의 개연성이자 장르입니다.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우산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짓던 소년은 이제 검은 우산 아래에서 세상을 의심하는 고독한 남자가 되었습니다. 강동원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연기로 영일이라는 캐릭터의 예민함과 냉철함을 표현했습니다. 대사보다는 눈빛과 분위기로 압도하는 장면이 많은데 특히 모니터를 응시하거나 비 오는 거리를 걷는 장면에서의 아우라는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는 잘생김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된 인간의 피폐함을 연기했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퀭해지는 눈과 거칠어지는 피부 톤은 영일이 겪는 심리적 압박감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영화의 느와르적 분위기를 한층 더 짙게 만들었습니다. 강동원은 설계자라는 역할에 맞게 관객의 시선을 완벽하게 설계하고 통제하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무생,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인 대체 불가한 빌런

이치현 역을 맡은 이무생 배우는 이 영화의 긴장감을 담당하는 핵심 축입니다. 그는 선인지 악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으로 영일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헷갈르게 만듭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말투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가시 같은 느낌을 너무나도 잘 살려냈습니다. 특별한 액션이나 과격한 언행 없이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그의 존재감은 이무생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숙, 관록으로 빚어낸 베테랑의 품격과 반전

재키 역의 이미숙 배우는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묵직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과거의 영광에 젖어 사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노련미를 발휘하는 베테랑의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특히 치매 증상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연기는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진짜 배신자인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드는 훌륭한 장치로 작용했습니다. 강동원과의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케미스트리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모호함이 주는 호불호의 갈림길

설계자는 분명 매력적인 소재와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살인 도구로 활용한다는 설정은 신선한 공포를 줍니다. 빗소리 바람 소리 등 청각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사운드 디자인과 차갑고 습한 도시의 이미지를 담아낸 영상미는 느와르 장르의 쾌감을 충족시켜 줍니다. 특히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을 슬로우 모션이나 정교한 편집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은 시각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 방식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관객들은 영일이 천재적인 두뇌로 거대 조직을 무너뜨리는 쾌감을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영화는 오히려 영일의 내면이 무너지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이로 인해 중반 이후 전개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가장 큰 호불호 요소는 역시 결말입니다.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고 모호하게 끝맺는 방식은 여운을 주기도 하지만 뚜렷한 서사를 선호하는 관객들에게는 허무함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청소부의 정체가 맥거핀으로 남겨진 점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자는 우리가 믿는 진실이 과연 진짜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현대 사회의 불안과 불신을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 세련되게 녹여냈습니다. 비 오는 날 혼자 조용히 사색하며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거리를 걸을 때 머리 위를 한 번쯤 쳐다보게 된다면 당신도 이미 영일의 설계에 빠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설계자 #강동원 #이무생 #범죄스릴러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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