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오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계절입니다.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먼지 쌓인 앨범처럼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서툴러서 아프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미화된 그 이름 바로 첫사랑입니다. 2012년 개봉하여 대한민국에 거대한 첫사랑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건축학개론은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네 명의 배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쌓아 올리는 감정의 집은 보는 이들에게 잊고 지냈던 설렘을 다시금 선물합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를 승민과 서연으로 만들었던 이 영화의 페이지를 다시 한번 넘겨보려 합니다.
15년 만에 불쑥 찾아온 그녀와 함께 시작된 집 짓기 프로젝트
이야기는 서른다섯 살의 평범한 건축가 승민의 사무실에 낯선 듯 익숙한 여인이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승민의 대학 시절 첫사랑 서연이었습니다.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 세련된 사모님이 되어 나타난 서연은 대뜸 승민에게 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옛집을 새로 지어달라고 의뢰합니다. 승민은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지만 결국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제주도로 내려가 집을 짓기 위한 설계를 시작합니다.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과정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묵혀있던 15년 전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어 다시 맞추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시계바늘은 1996년으로 되돌아갑니다. 스무 살의 풋풋한 새내기 승민은 건축학과 학생으로 건축학개론 수업을 듣게 됩니다. 그 수업에서 음대생인 서연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정릉이라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공통점을 알게 된 두 사람은 함께 과제를 수행하며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숫기 없고 연애라고는 글로도 배워본 적 없는 숙맥 승민에게 당돌하고 솔직한 서연은 감당하기 벅찬 존재이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대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업 과제인 동네 탐방을 핑계로 골목길을 누비고 빈집을 찾아 들어가며 둘만의 비밀스러운 추억을 쌓아갑니다. 서연은 승민에게 전람회의 CD를 빌려주고 승민은 서연에게 집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함께 이어폰을 나눠 끼고 기억의 습작을 듣던 버스 정류장의 풍경과 늦은 밤 가로등 아래서 나누던 수줍은 대화들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몽글몽글하게 만듭니다. 승민의 친구이자 연애 코치인 납득이의 코치를 받으며 승민은 서연에게 고백할 타이밍을 노리지만 용기가 없어 매번 망설이기만 합니다.
엇갈린 타이밍과 오해가 만들어낸 첫사랑의 비극
제주도에서의 집 짓기가 진행될수록 현재의 승민과 서연 사이에도 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서연은 이혼의 아픔을 겪고 홀로서기를 준비 중이었고 승민은 같은 사무실의 동료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고 벽지를 고르며 티격태격하는 동안 두 사람은 과거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조금씩 털어놓게 됩니다. 서연은 왜 그때 자신에게 잘해줬냐고 묻고 승민은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고 답합니다. 15년 전 서로를 향해 있었지만 닿지 못했던 마음들이 낡은 집터 위에서 뒤늦게 교차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와 1996년의 승민은 서연을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자신감은 작아져만 갑니다. 강남에 사는 부유한 방송반 선배가 서연에게 관심을 보이자 강북의 낡은 집에 사는 자신의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승민은 어머니가 사준 메이커 짝퉁 티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어머니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로 자격지심에 시달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종강 파티가 있던 밤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술에 취한 서연을 그 방송반 선배가 부축해 집으로 데려가는 모습을 승민이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승민은 그 상황에서 서연을 구하거나 선배를 막아세울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저 문 뒤에 숨어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오해와 절망에 빠집니다. 자신이 서연을 지켜줄 수 없다는 무력감과 서연이 선배와 잤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에 사로잡힌 승민은 결국 도망치듯 자리를 뜹니다. 다음 날 승민을 찾아온 서연에게 그는 차갑게 이별을 고합니다. "이제 좀 꺼져줄래"라는 모진 말로 서연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이 아끼던 전람회 CD마저 돌려주며 승민은 스스로 첫사랑을 끝내버립니다.
그렇게 아무런 해명도 듣지 못한 채 서연은 떠나갔고 승민은 군 입대를 하며 도망치듯 청춘의 한 페이지를 덮어버렸습니다. 첫 눈이 오는 날 빈집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도 지키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이 승민이 기억하는 첫사랑의 아프고 지질했던 마지막이었습니다. 현재의 승민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해하고 서연은 완성되어가는 집을 보며 말없이 눈물짓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15년 만에 밝혀진 진심과 완성된 집
드라마의 후반부는 현재의 제주도 집이 완성되는 시점과 맞물려 과거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로 진행됩니다.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승민은 서연이 짐을 정리하다가 꺼내 놓은 상자 안에서 낯익은 물건을 발견합니다. 바로 15년 전 자신이 서연에게 돌려주었던 전람회 CD와 자신이 직접 만들어 선물했던 집 모형이었습니다. 승민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자신이 버렸던 그 물건들을 서연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서연 역시 승민을 좋아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회상 장면이 다시 이어지며 진실이 밝혀집니다. 첫 눈이 오던 날 서연은 약속 장소인 빈집에 혼자 나가 승민을 기다렸습니다. 덜덜 떨면서 늦은 밤까지 기다렸지만 승민은 오지 않았고 서연은 눈물과 함께 CD 플레이어와 쪽지를 그곳에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나중에 승민이 그 빈집을 찾아가 서연이 남긴 흔적을 발견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영화는 서연이 오랫동안 승민을 마음에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5년 전 두 사람은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서툰 표현과 오해로 인해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끝났던 것입니다.
완성된 제주도 집의 거실 통유리 너머로 푸른 바다가 펼쳐집니다. 그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승민과 서연은 15년 만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키스를 나눕니다. 늦었지만 "나도 널 좋아했어"라는 고백이 공간을 채웁니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현재에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승민에게는 약혼녀가 있고 서연에게는 정리해야 할 삶이 있습니다. 결국 승민은 예정대로 약혼녀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고 서연은 승민이 지어준 집에 홀로 남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연은 승민이 택배로 보내온 CD 플레이어를 듣습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서연은 미소 짓고 카메라는 아름답게 지어진 집과 그곳에 스며든 두 사람의 추억을 비추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비록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함께 지은 집은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그 시절 가장 찬란했던 두 사람을 기억할 것이라는 여운을 남깁니다.
이제훈, 90년대의 공기와 감성을 완벽하게 입은 청춘의 얼굴
과거의 승민 역을 맡은 이제훈 배우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발견이자 보석입니다. 그는 갓 스무 살이 된 남학생의 어설픔과 순수함을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좋아하는 여학생 앞에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몸짓이나 질투심에 괜히 심술을 부리는 표정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나도 저랬었지"라는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정릉 골목길을 걸으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나 납득이에게 연애 상담을 하며 답답해하는 장면에서는 귀여움마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후반부 오해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감정 연기에서는 깊은 슬픔과 분노를 폭발시키며 배우로서의 넓은 스펙트럼을 증명했습니다. 이제훈이 연기한 승민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때로는 답답하고 찌질해 보였지만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했습니다.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의 연기는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는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수지, 국민 첫사랑이라는 수식어가 허락된 유일한 존재
과거의 서연을 연기한 수지는 건축학개론을 통해 단숨에 대한민국 남성들의 로망이자 국민 첫사랑으로 등극했습니다.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하고 등장한 그녀의 비주얼은 그 자체로 첫사랑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수지는 연기 경력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돌하면서도 속 깊은 서연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 냈습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강의실에서 승민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버스 안에서 이어폰을 나눠 끼며 설레하는 표정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청량감을 선사했습니다. 단순히 예쁜 모습을 넘어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먼저 다가가는 적극성과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받은 내면 연기까지 안정적으로 해냈습니다. 수지가 있었기에 영화 속 서연은 단순히 대상화된 첫사랑이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청춘의 한 페이지로 기억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조정석, 영화의 맛을 살린 대체 불가한 신 스틸러
건축학개론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납득이 역의 조정석 배우입니다. 승민의 친구이자 재수생인 납득이는 영화의 웃음을 책임지는 핵심 캐릭터입니다. 무스르 잔뜩 바른 머리와 펑퍼짐한 힙합 바지를 입고 등장해 승민에게 연애 기술을 전수하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명장면으로 회자됩니다.
특히 "키스란 말이야"로 시작되는 그의 키스 강의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현란한 손동작과 찰진 대사 처리로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든 그의 연기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조정석은 과장된 코믹 연기 속에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까지 담아내며 미친 존재감을 발산했습니다. 주연 배우들 못지않은 인기를 얻으며 스타덤에 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소환과 현실적인 답답함 사이의 평가
건축학개론은 멜로 영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극장가에 4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킨 수작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탁월한 감성 연출과 공감대 형성입니다. 삐삐와 CD 플레이어 그리고 무스 같은 90년대 소품들을 활용해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고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짝사랑의 기억을 섬세하게 터치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카피처럼 영화는 관객 각자의 기억을 소환하여 영화를 완성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 존재합니다.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은 남자 주인공 승민의 태도입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 한 번 못해보고 혼자 오해해서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리는 모습은 현실적이라 공감되면서도 동시에 큰 답답함을 유발합니다. 또한 현재 시점의 이야기보다 과거 시점의 이야기가 훨씬 매력적이어서 엄태웅과 한가인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다소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현재의 승민이 약혼녀를 두고 첫사랑에게 흔들리는 모습이 도덕적으로 불편하다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학개론은 웰메이드 로맨스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예의와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에 대해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집을 짓는 과정을 사랑을 쌓아가는 과정에 빗댄 은유 또한 훌륭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기억에 남는 첫사랑처럼 이 영화 역시 완벽하지 않기에 더 오랫동안 관객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오늘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잊고 지냈던 그 시절의 나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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