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던 여배우가 있었습니다. 사랑과 영혼으로 전 세계를 울렸고 어 퓨 굿 맨과 은밀한 유혹으로 흥행을 이끌었던 데미 무어입니다. 하지만 전성기가 지나자 그녀의 이름은 점점 스크린에서 멀어졌고 연기보다 외모나 사생활로 더 자주 이야기되는 배우가 됐습니다. 그런 데미 무어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영화가 서브스턴스입니다.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버려진 여배우가 젊음을 되찾기 위해 수상한 약물에 손을 대는 이 이야기는 데미 무어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서브스턴스는 끔찍하고 역겨우면서도 이상하게 슬픈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로 데미 무어는 배우 인생 45년 만에 처음으로 연기상을 품에 안았습니다.
팝콘 배우라 불렸던 데미 무어가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데미 무어는 1990년 사랑과 영혼의 성공 이후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1996년 스트립티즈와 이듬해 지아이 제인 이후로는 흥행작도 대표작도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 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조연이나 작은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데 그쳤고 커리어가 사실상 끝났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2025년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서브스턴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미 무어는 무대 위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습니다. 45년 넘게 연기를 해 왔지만 배우로서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이죠. 30년 전 한 프로듀서에게 돈은 잘 벌지만 인정받을 수는 없는 팝콘 배우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오랫동안 믿어 왔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서브스턴스의 대담하고 기괴한 각본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수상 소감은 그날 밤 가장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서브스턴스는 앞서 2024년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과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분장상을 받았습니다.
쉰 살 생일에 해고된 스타 엘리자베스 스파클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한때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새긴 톱스타였습니다. 지금은 아침 방송에서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쉰 살 생일날 그녀는 방송국 프로듀서 하비가 화장실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됩니다. 이제 너무 늙었으니 더 젊고 섹시한 진행자로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생일 당일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충격에 빠진 채 운전하던 엘리자베스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한 젊은 남자 간호사가 몰래 USB 하나를 건넵니다. 그 안에는 서브스턴스라는 정체불명의 약물을 소개하는 영상이 담겨 있었습니다. 단 한 번의 주사로 더 젊고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광고였습니다. 거리의 대형 광고판에서 자신의 얼굴이 뜯겨 나가는 모습을 본 엘리자베스는 망설임 끝에 약물을 주문합니다. 비밀스러운 창고에서 상자를 받아 온 그녀는 욕실에서 스스로 주사를 놓습니다. 곧 그녀의 등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젊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자신이 태어납니다. 새로운 그녀는 자신을 수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일주일씩 번갈아 살아야 하는 두 개의 몸
서브스턴스에는 몇 가지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두 몸은 정확히 7일씩 번갈아 깨어 있어야 하고 한쪽이 활동하는 동안 다른 쪽은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습니다. 수는 매일 엘리자베스의 척추에서 뽑은 안정액을 주사해야 몸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젊고 완벽한 수는 곧바로 엘리자베스의 후임 진행자 오디션에 합격하며 방송국의 새 스타가 됩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한 몸에 받는 삶에 취한 수는 7일이 지나도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결국 수는 규칙을 어기고 엘리자베스의 척추액을 더 뽑아 쓰며 자신의 시간을 늘립니다. 그 대가는 엘리자베스가 치릅니다. 깨어날 때마다 그녀의 몸은 급격히 늙어 가고 손가락부터 흉측하게 변해 갑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시간을 빼앗는 수를 증오하게 되고 수는 늙고 추해진 엘리자베스를 경멸합니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만난 옛 동창과 데이트 약속을 잡지만 외출 직전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고 또 고치다가 끝내 집을 나서지 못합니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아픈 순간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수가 새해 전야 특집 방송의 진행자로 발탁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괴물이 되어 다시 선 무대
이 부분부터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가 규칙을 너무 오래 어긴 탓에 다시 깨어난 엘리자베스는 등이 굽은 노파의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절망한 엘리자베스는 모든 것을 끝내는 종료 약물을 주문해 수에게 주입하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수를 향한 미련 때문에 멈추고 맙니다. 그 사이 깨어난 수는 엘리자베스를 발견하고 두 사람은 처절하게 싸웁니다. 결국 수는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맙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사라지자 안정액을 구할 수 없게 된 수의 몸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가 빠지고 손톱이 떨어지고 귀가 떨어져 나갑니다. 새해 전야 방송을 앞둔 수는 딱 한 번만 쓰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남은 약물을 자신에게 주사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은 엘리자베스와 수가 뒤엉킨 끔찍한 괴물이었습니다. 괴물은 엘리자베스의 옛 포스터에서 오려 낸 얼굴을 가면처럼 붙이고 드레스를 입은 채 무대에 오릅니다.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고 무대는 피바다가 됩니다. 도망친 괴물의 몸은 결국 터져 버리고 마지막 남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바닥을 기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새겨진 자신의 별 위에 도착합니다. 그 얼굴은 그곳에서 녹아내리고 다음 날 아침 청소차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흔적을 씻어 냅니다.
코랄리 파르자가 완성한 바디 호러의 정점
서브스턴스를 연출한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프랑스 출신으로 전작 리벤지에서 이미 과감한 장르 연출을 선보였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몸이 찢어지고 변형되는 바디 호러를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컴퓨터 그래픽보다 실제 특수 분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살과 피의 질감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생합니다. 아카데미 분장상 수상이 이를 증명합니다. 반듯하게 대칭을 이루는 화면과 끝없이 이어지는 방송국 복도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떠올리게 하고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관객이 인물의 몸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고전 공포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곳곳에 숨겨 두면서도 전체적인 인상은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창적인 스타일로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서브스턴스가 단순히 잔인하기만 한 영화였다면 이렇게까지 주목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영화의 공포는 결국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소비하는 사회를 향합니다. 새우를 게걸스럽게 먹는 하비의 입과 수의 몸을 훑는 카메라처럼 영화는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인 방식으로 그 시선을 보여 줍니다. 엘리자베스를 가장 괴롭힌 것은 괴물 같은 약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였다는 점에서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의 정점이자 날카로운 풍자극입니다.
데미 무어와 마거릿 퀄리 데니스 퀘이드의 연기
엘리자베스 역의 데미 무어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거울 앞에서 무너지는 표정과 늙어 가는 자신을 향한 분노 그리고 수에 대한 애증까지 대사보다 몸과 얼굴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커리어와 겹쳐 보이는 역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입니다. 다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특수 분장이 연기를 대신하는 장면이 많아져 배우 본인의 연기를 오래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수 역의 마거릿 퀄리는 완벽하게 반짝이는 미소 뒤에 숨은 이기심과 불안을 능청스럽게 표현하며 데미 무어와 팽팽한 대결을 펼칩니다. 하비 역의 데니스 퀘이드는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여성을 상품처럼 대하는 방송계 권력자를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역겹게 그려 냅니다. 캐릭터가 지나치게 만화처럼 단순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영화의 풍자적인 분위기에는 잘 어울립니다.
강렬한 만큼 관객을 가리는 영화
서브스턴스의 장점은 분명합니다.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강렬한 이미지와 메시지 그리고 데미 무어의 인생을 건 연기가 있습니다. 화려한 색감과 대담한 음악도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끌어올립니다. 외모 강박이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도 장르 팬이 아닌 관객까지 끌어들인 힘입니다.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노출과 잔혹한 장면의 수위가 매우 높아 비위가 약한 관객에게는 보기 힘든 영화입니다. 2시간 20분이 넘는 상영 시간에 비해 중반부 전개가 반복적이라는 평가도 있고 메시지를 너무 직접적으로 외친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특히 마지막 괴물 장면은 통쾌하다는 반응과 지나치게 과하다는 반응으로 크게 엇갈립니다. 그럼에도 서브스턴스는 나이 들어 버려진다는 공포를 이토록 선명하게 그려 낸 작품이자 데미 무어라는 배우를 다시 보게 만든 영화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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