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계단을 오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재떨이가 들려 있고 그의 걸음에는 망설임과 결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흑백의 화면은 그의 표정을 명확히 보여주지 않지만 우리는 그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려 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리플리는 바로 이런 숨 막히는 긴장감과 서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1955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시리즈는 이전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는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줍니다. 컬러풀한 지중해의 풍경 대신 차갑고 정적인 흑백의 미장센을 선택함으로써 인물의 불안정한 심리와 거짓말로 쌓아 올린 세계의 위태로움을 극대화합니다. 가진 것 없는 한 남자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치기로 결심한 순간 시작되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보는 내내 우리의 심장을 조여오며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줄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남자 모든 것을 원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1960년대 초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입니다. 삼류 사기꾼 톰 리플리는 각종 청구서를 위조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별 볼 일 없는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번듯한 직업도 가족도 화려한 미래도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찾아옵니다. 거대한 조선 회사를 운영하는 부유한 허버트 그린리프가 그를 찾아와 이탈리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 디키 그린리프를 뉴욕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허버트는 톰을 디키의 대학 동창으로 오해했고 톰은 이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습니다.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직감하고 제안을 수락합니다. 성공 보수와 모든 경비를 지원받아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해안 마을 아트라니에 도착한 톰의 눈앞에는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완벽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요트 위에서 여유를 즐기고 아름다운 연인 마지 셔우드와 사랑을 속삭이는 디키의 삶은 톰에게 동경을 넘어선 강렬한 질투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디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접근하며 서서히 그의 인생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디키가 가진 모든 것 그의 옷 그의 말투 그의 재산 그리고 그의 연인 마지까지 톰은 그 모든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비극
톰은 디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계획하고 그의 취향과 관심사를 파고들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행동합니다. 처음에는 톰을 경계하던 디키도 점차 그에게 마음을 열고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집니다. 톰은 디키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꿈에 그리던 상류층의 삶을 맛봅니다. 하지만 이들의 위태로운 우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톰이 자신에게 집착하며 동성애적인 감정을 내비치자 디키는 그에게 점차 환멸을 느끼고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디키의 연인 마지 역시 처음부터 톰의 정체를 의심하며 그를 경계합니다. 자신이 꿈꿔왔던 세계에서 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톰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괴물이 서서히 깨어납니다. 그는 디키와 함께 떠난 산레모 여행 중 보트 위에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고 디키에게 버림받을 것을 직감합니다. 그 순간 톰은 묵직한 노로 디키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하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유기합니다. 자신의 완벽한 인생을 지키기 위해 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톰은 디키를 죽인 후 그의 신분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디키의 필체를 연습하고 그의 서명을 위조하며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마치 디키가 살아있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속입니다. 하지만 완벽할 것 같았던 그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균열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완벽한 연기로 괴물을 창조한 앤드루 스콧
넷플릭스 리플리의 성공은 주인공 톰 리플리 역을 맡은 배우 앤드루 스콧의 공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선과 악을 넘나드는 복잡한 인물 톰 리플리를 그야말로 완벽하게 창조해냈습니다. 앤드루 스콧이 연기하는 톰은 이전의 리플리들과는 다릅니다. 그는 매력적인 사기꾼이라기보다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불안에 떠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의 어색한 미소와 불안한 눈빛은 그가 얼마나 깊은 열등감과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앤드루 스콧은 대사 없이도 미세한 표정 변화와 몸짓만으로 톰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입니다. 특히 디키를 살해하는 장면과 그 이후 그의 신분을 훔쳐 살아가며 느끼는 불안감과 희열을 동시에 표현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그는 선량한 얼굴 뒤에 숨겨진 괴물의 섬뜩함을 점진적으로 드러내며 시청자들이 톰이라는 인물에게 연민과 혐오를 동시에 느끼게 만듭니다. 디키 그린리프 역의 조니 플린과 마지 셔우드 역의 다코타 패닝 역시 안정적인 연기로 극의 깊이를 더합니다. 조니 플린은 부유하지만 내면의 공허함을 가진 디키의 매력과 결핍을 동시에 표현했으며 다코타 패닝은 예리한 직감으로 톰의 거짓을 꿰뚫어 보는 마지 역을 맡아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흑백으로 완성된 지옥도 그 결말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이 부분을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디키 행세를 하던 톰은 그의 친구 프레디 마일스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인해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합니다. 의심을 품고 자신을 찾아온 프레디를 톰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묵직한 재떨이로 살해하며 두 번째 범죄를 저지릅니다.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지만 톰은 특유의 침착함과 치밀함으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는 디키가 프레디를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는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경찰과 디키의 아버지 허버트 그린리프까지 감쪽같이 속이는 데 성공합니다. 모든 의심에서 벗어난 톰은 디키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고 새로운 신분으로 베네치아에서 호화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벽한 인생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마지가 톰이 디키의 필체로 쓴 책을 발견하고 모든 것이 그의 거짓말이었음을 깨닫는 듯한 암시를 주며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의 범죄가 결국에는 드러날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며 그의 거짓된 평화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보여줍니다. 결국 톰 리플리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영원히 불안과 의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만의 지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느리지만 깊게 파고드는 심리 스릴러의 정수
넷플릭스 시리즈 리플리는 숨 가쁘게 전개되는 요즘의 콘텐츠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작품입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모든 것을 흑백 화면에 담아냈다는 점입니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풍경을 흑백으로 처리함으로써 화려한 배경에 현혹되지 않고 오롯이 인물의 심리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비는 톰 리플리의 이중적인 내면과 도덕적 모호함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냅니다. 또한 의도적으로 느리게 가져가는 호흡은 톰의 범죄 계획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시청자가 함께 체험하게 만들며 서스펜스를 극대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누군가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전개가 매우 느리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스릴러를 기대하는 시청자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8부작이라는 긴 호흡 동안 비슷한 패턴의 긴장감이 반복되는 것 역시 단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영화를 통해 여러 번 변주되었던 이야기이기에 결말을 예측하기 쉽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플리는 잘 만든 한 편의 필름 누아르 영화를 보는 듯한 깊이와 품격을 지닌 수작임에 분명합니다. 화려한 볼거리 대신 인간 내면의 깊은 어둠을 탐구하는 심리 스릴러의 정수를 맛보고 싶다면 이 흑백의 세계에 기꺼이 빠져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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