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가장 존귀한 존재이자 가장 엄격한 규율 속에 살아야 했던 왕. 만약 그 지엄한 용상에 앉은 왕이 사실은 비밀을 품은 여자였다면 어땠을까요. KBS 드라마 ‘연모’는 바로 이처럼 대담하고도 매혹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궁중 로맨스 사극입니다.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져야 했고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해 남장을 한 채 왕세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 비밀스러운 세상에 뛰어든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기존 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재미와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배우 박은빈의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완성된 이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단순히 남장여자의 로맨스를 넘어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위대한 서사로 우리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쌍생은 불길하다는 낙인 아래 버려진 아이
이야기는 조선의 왕실에서 아무도 축복하지 않는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시작됩니다. 왕세자빈이 아들과 딸 쌍생아를 낳자 왕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여아를 죽이라는 어명을 내립니다. 차마 제 딸을 죽일 수 없었던 세자빈은 몰래 아이를 궁 밖으로 빼돌려 살립니다. 그렇게 ‘담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은 아이는 훗날 운명의 이끌림처럼 궁녀가 되어 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 오라비이자 왕세자인 이휘와 운명적으로 재회합니다. 자신과 꼭 닮은 담이의 존재를 신기하게 여긴 어린 세자 이휘는 잠시 옷을 바꿔 입고 궁 밖을 구경하고 싶다는 위험한 제안을 하고 담이는 오라비의 청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짧은 장난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끔찍한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맙니다. 담이의 옷을 입고 궁 밖에 나갔던 세자 이휘가 담이를 노리던 자객에게 대신 살해당하고 만 것입니다.
오라비의 죽음, 왕세자라는 거짓된 삶의 시작
눈앞에서 오라비의 죽음을 목격한 담이와 세자빈은 절망에 빠집니다. 왕세자의 죽음이 알려지는 순간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담이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 결국 세자빈은 딸을 살리고 왕실의 후계를 지키기 위해 담이에게 죽은 이휘를 대신해 왕세자로 살아갈 것을 명하는 잔인한 선택을 내립니다. 그날부로 ‘담이’는 세상에서 죽고 오직 왕세자 ‘이휘’만이 남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지우고 오라비의 삶을 살게 된 휘는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인물로 성장합니다. 그는 혹독한 제왕 교육을 견디며 완벽한 왕세자의 모습을 연기하지만 매 순간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고독한 싸움을 이어갑니다. 드넓은 궁궐은 그에게 가장 화려한 감옥이었고 왕세자라는 이름은 가장 무거운 족쇄였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에 스며든 첫사랑, 정지운
그렇게 감정 없는 인형처럼 살아가던 휘의 세상에 어느 날 그의 스승인 서연관으로 정지운(로운 분)이 나타납니다. 사실 두 사람의 인연은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운은 과거 궁녀였던 담이와 짧은 만남을 가졌고 ‘연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그녀를 자신의 소중한 첫사랑으로 마음속에 간직해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스승과 제자로 다시 만난 지금 지운은 눈앞의 왕세자 이휘가 자신의 첫사랑 담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가면 뒤에 숨겨진 휘의 상처와 외로움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진심으로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지운의 따뜻하고 굳건한 태도에 휘 역시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휘에게 지운을 향한 마음은 결코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었습니다. 왕과 신하라는 신분의 벽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는 남자와 남자라는 금기의 벽 앞에서 휘는 자신의 연모(戀慕)를 숨긴 채 지운을 밀어내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에 괴로워합니다.
왕의 무게를 견뎌낸 배우 박은빈과 로운
드라마 ‘연모’의 성공은 주인공 이휘를 연기한 배우 박은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박은빈은 단순히 남자의 흉내를 내는 것을 넘어 여자의 몸으로 평생을 남자로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 그리고 제왕의 카리스마를 완벽하게 표현해냈습니다. 낮은 목소리 톤과 위엄 있는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연기는 그녀가 왜 이 시대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지를 증명했습니다. 특히 왕세자로서의 근엄한 모습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잠시나마 드러나는 여성으로서의 여린 모습을 오가는 그녀의 섬세한 연기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정지운 역의 로운 역시 안정적인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았습니다. 그는 다정하고 올곧은 성품을 지닌 지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하며 박은빈과의 완벽한 연기 호흡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비밀과 아픔을 모두 끌어안는 그의 순애보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설렘과 감동을 선사하며 드라마의 로맨스 서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마침내 되찾은 이름, 그들의 마지막 선택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이 부분을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휘와 지운의 사랑은 결국 거대한 운명의 벽과 마주합니다. 휘의 할아버지이자 절대 권력자인 한기재가 휘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를 빌미로 역모를 일으키면서 궁궐은 피바람에 휩싸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지운과 휘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역적들을 몰아내고 모든 것을 바로잡는 데 성공합니다. 마침내 왕위에 오른 휘는 모든 진실을 밝히고 스스로 용상에서 내려오는 선택을 합니다. 왕 이휘는 역사 속에서 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고 그녀는 마침내 ‘담이’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게 됩니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평범한 여인 담이로 돌아간 그녀와 사랑하는 연인 지운이 바닷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비추며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새로운 길을 연 사극, 그 성취와 아쉬움
‘연모’는 ‘여자가 왕이 된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 기존 사극의 문법을 뛰어넘은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성취는 남장여자라는 소재를 단순히 로맨스의 재미를 위한 장치로 사용하지 않고 한 인간의 정체성과 운명 개척이라는 묵직한 주제와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 박은빈의 전무후무한 캐릭터 소화력은 드라마의 모든 서사에 깊은 설득력을 부여했습니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주조연 배우들의 호연 역시 극의 완성도를 높인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중반부 궁중 암투를 다루는 과정에서 일부 전개가 다소 상투적이거나 늘어진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매력적인 일부 조연 캐릭터들의 서사가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소모적으로 그려진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모’는 2021년 국제 에미상 텔레노벨라 부문 수상을 통해 증명했듯 전 세계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사극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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