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앞에서 살짝 겁이 났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디세이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트로이의 목마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10년의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단순한 신화 재현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와 죄책감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야기였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오펜하이머를 거쳐 이번에는 고대 서사시라는 낯선 소재에 도전했다는 소식만으로도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습니다. 맷 데이먼과 앤 해서웨이 톰 홀랜드는 물론 로버트 패틴슨 젠데이아 샤를리즈 테론까지 이름만 들어도 놀랄 만한 배우들이 대거 합류했고 여기에 영화 역사상 최초로 전 분량을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면서 개봉 전부터 역대급 프로젝트라는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극장에서 마주한 오디세이는 그 기대에 걸맞은 무게감을 가진 작품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줄거리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결말까지 최대한 솔직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영웅이 아닌 인간 오디세우스의 귀향길
이야기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10년이 흐른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오디세우스는 이미 고향 이타카에서 노래로만 전해지는 전설 같은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재산을 노린 구혼자들은 아내 페넬로페에게 청혼하겠다는 핑계로 궁전을 점거하고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식량을 구하러 들른 섬에서 외눈박이 거인을 만나고 마녀가 다스리는 섬에서 부하들을 잃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로 거대한 풍랑에 휩쓸리는 등 끝없는 시련을 겪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오디세이아의 익숙한 얼개를 따라갑니다. 하지만 놀란 감독은 신화 속 지혜롭고 강인한 영웅의 얼굴 대신 전혀 다른 오디세우스를 보여줍니다. 그는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도 끝내 웃지 못합니다. 트로이 목마라는 계책이 사실은 인간 사이의 신뢰를 깨버린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리스군이 트로이에서 벌인 살육과 파괴에 대한 책임 그리고 자신의 명령을 따르다 목숨을 잃은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습니다. 영웅담을 완성하는 대신 부끄러움을 아는 한 인간이 되는 쪽을 택하는 이 전개가 영화 전체의 정서를 결정짓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왕좌를 비운 20년 동안 아내 페넬로페 역시 결코 편안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무법천지가 된 이타카에서 새 왕이 필요하다며 재혼을 강요하는 구혼자들에게 시달려온 그는 오랜 경험과 지식을 갖췄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스스로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설정들이 더해지면서 오디세이는 단순히 한 영웅의 모험담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사람들 각자의 상처를 다루는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놀란 특유의 비선형적 구성도 이 여정에 힘을 더합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무용담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전투와 현재의 항해가 겹쳐지면서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가는 성찰의 여정처럼 다가옵니다. 신들이 내린 형벌처럼 보이는 시련들도 결국은 인간 스스로의 오만과 선택이 불러온 대가라는 점을 영화는 계속해서 상기시킵니다.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영리한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오만함과 선원들의 탐욕이 어떻게 귀향을 지연시켰는지도 함께 드러내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전쟁 장면을 다루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놀란 감독은 트로이 전쟁을 영웅의 승리를 찬양하는 장관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불타는 성과 무너지는 사람들 그리고 승리를 외치는 병사들과 모든 것을 빼앗긴 이들의 절규를 같은 화면 안에 겹쳐놓으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 때문에 오디세이는 단순한 모험 활극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영화로 다가옵니다.
맷 데이먼 앤 해서웨이 톰 홀랜드가 그려낸 신화 속 인물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배우들의 존재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맷 데이먼은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단순한 전쟁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직시하는 한 인간으로 완성해냈습니다. 촬영 과정이 상당히 고될 것이라는 감독의 경고에도 도전을 받아들였다고 알려졌는데 실제 스크린에서도 그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지략가로서의 영리함과 죄책감에 짓눌린 인간적인 모습을 오가는 연기가 이 영화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페넬로페 역시 신화 속에서 남편을 기다리기만 하던 수동적인 왕비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20년 동안 재혼을 강요하는 구혼자들의 압박을 견디며 이타카를 지켜온 그는 왕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보여줍니다. 오랜 경험과 지식을 갖췄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장면에서는 이 캐릭터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아들 텔레마코스와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도 해서웨이는 왕비이자 어머니로서의 위엄을 동시에 보여주며 극에 무게감을 더합니다.
톰 홀랜드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맡아 부자 관계의 드라마에 무게를 더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해야 했던 인물의 불안과 책임감을 섬세하게 표현하며 스파이더맨 시리즈와는 확연히 다른 결의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도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극 중 가장 현실적인 성장담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에 헬레네 역의 루피타 뇽오와 병사 시논 역의 엘리엇 페이지 캐스팅을 두고 개봉 전 논란이 있었지만 실제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상황과 연기 모두 자연스럽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놀란 감독이 신화 속 인물의 정의 자체를 다시 쓰면서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젠데이아가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로버트 패틴슨이 구혼자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안티노오스를 맡아 극의 긴장감을 더했고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마녀 칼립소 역시 짧은 등장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화려한 캐스팅이 단순히 이름값으로만 소비되지 않고 저마다의 서사에 밀도를 더했다는 점이 이 영화의 큰 미덕입니다.
압도적인 아이맥스 촬영과 다소 무거운 감상
오디세이는 영화 역사상 최초로 전 분량을 70밀리미터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작품입니다. 제작진은 그리스와 모로코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등 세계 각지를 돌며 실제 로케이션을 촬영했고 컴퓨터그래픽 사용을 최소화한 채 고대 그리스 선박과 트로이 목마 이타카 궁전까지 실물 크기로 제작해 촬영했습니다. 폭풍우 장면은 대형 제트 엔진과 수포 분사기를 동원한 초대형 수중 촬영 수조에서 완성했다고 하는데 실제 스크린으로 보면 그 스케일이 확실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다만 이 영화가 모두에게 편안한 관람 경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172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과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전쟁의 참상을 미화하지 않고 정면으로 담아내는 장면들이 상당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갔다면 예상보다 더 무겁고 진지한 톤에 당황할 수 있습니다. 곳곳에 등장하는 신화 속 괴수들도 단순한 볼거리로 소비되지 않고 저마다 사연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는 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또한 국내 상영관에는 진짜 아이맥스 필름 영사 시설이 없어 디지털 변환 버전으로 관람해야 한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아이맥스 필름은 디지털카메라보다 세 배 이상 높은 해상도를 자랑하는 현존 최고 화질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필름 상영을 지원하는 극장이 전 세계에 마흔한 곳뿐이라 해외 원정 관람을 떠나는 관객들까지 생겼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정사각형에 가까운 아이맥스 화면비로 관람하면 일반 상영관과는 확실히 다른 공간감을 느낄 수 있어 가능하다면 아이맥스관 관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목마 이후 오디세우스가 마주한 진짜 전쟁
지금부터는 결말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으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이 부분을 건너뛰시길 권합니다.
수많은 시련 끝에 마침내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는 것은 감격의 재회가 아니라 궁전을 점거한 구혼자들과의 마지막 대결입니다. 신화에서는 이 장면이 영웅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그려지지만 영화는 여기서도 순수한 승리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또 다른 폭력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트로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당함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해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승리의 순간에도 카메라는 환호보다 오디세우스의 흔들리는 표정을 오래 붙잡아두는데 이 선택 하나만으로도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페넬로페와의 재회 역시 눈물의 포옹으로 손쉽게 봉합되지 않습니다. 20년의 세월 동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싸워온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알아가야 하는 현실적인 거리감이 남아있는 채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페넬로페는 그동안 홀로 이타카를 지켜온 자신의 시간을 오디세우스에게 담담히 설명하고 오디세우스 역시 자신이 겪은 일들을 모두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완전히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이 결말은 신화적 해피엔딩보다 훨씬 더 여운이 깁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결국 적을 무찌르는 것보다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잃어버린 것들을 감당하는 과정에 가깝다는 메시지가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웅장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신화 영화를 원한다면
오디세이는 확실히 쉬운 영화는 아닙니다. 172분의 긴 러닝타임과 전쟁의 참상을 직시하는 무거운 정서 그리고 비선형적 구성까지 관객에게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가볍게 즐길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다면 예상보다 훨씬 진지한 톤에 놀랄 수도 있고 액션의 쾌감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오히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해외 평단의 극찬과는 별개로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는 지나치게 진중한 분위기가 부담스럽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이 영화가 남기는 여운은 확실합니다. 영웅 서사를 인간의 죄책감과 성찰의 이야기로 바꿔놓은 놀란 감독의 시도는 로튼토마토에서 놀란 감독 작품 중 가장 높은 평론가 지수를 기록할 만큼 평단의 지지를 받았고 흥행 성적 역시 개봉 첫 주 만에 놀란 감독의 역대 최고 글로벌 실적을 경신했습니다. 압도적인 스케일의 영상미와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를 큰 스크린에서 경험하고 싶은 분들 그리고 익숙한 신화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만나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다만 가벼운 오락 영화를 찾고 있다면 다른 선택지를 고려해보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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